―그러나 데워질 수는 있다면

 


@YuSeong_1999

 


“형님.”


그리 불러대는 목소리가 익숙해지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에 필요했던 시간보다는 명백히 짧았다. “형님”이라 호칭하는 특유의 담담하고도 밝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면, 블레이드는 자연스레 그 허여멀건한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능글맞게도 선을 넘나드는 그를.


블레이드는 그것이 거슬렸다. 그러나 이를 그에게 언급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만 희미하게 감지했다. 불쾌함을 부러 참는 성정은 아님에도 블레이드는 이유조차 없이 그렇게 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에 가까울 테다.


기실 목소리에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같은 팀에 속한 자이므로. 카프카의 언령에 의식이 허물어지는 것처럼이나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의미 없는 고심을 했다. ‘이런 것’을 친밀감이라 정의할 수 있을는지. 그런 스쳐 지나가 잊힐 아주 짧은 고민을.

“형님.”


이번 임무에서 역시 요한은 그를 불렀다. 호명과 동시에 이유는 짐작했다. 요한이 보았던 미래가 지금, 이루어지려 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죽음이 수행되려 한다……. 그렇다. ‘누군가’의 죽음. 그러나 블레이드는 단지 검을 거세게 쥐는 것으로 답했다.


“형님?”


요한이 다시 한번 그를 부른다. 보다 작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테지. 요한은 언제나 마땅치 않은 말이나 하지 않던가. 다른 사소한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영생이라거나, 그런 것들 역시도.


요한이 블레이드를 불렀으므로, 그는 자연히 요한을 떠올렸다. 그 하얀 얼굴과 여유롭게 뜨인 푸른 눈이 눈앞에 그려진다. 곧바로 이어 뒤로 헐렁하게 묶은 머리와, 치렁치렁한 옷자락까지도. 그리고 마침내 그, 의뭉스러우면서도 맑은 미소에 닿았을 때엔.


그저 모든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제는 죽은 이의 방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하얀 사람은 책상에, 검은 사람은 침대에 기대어 바닥에. 덧붙이자면, 구석진 곳의 거울 아래 꿇어앉은 시체 하나까지도. 둥글게 깨진 거울과 박살 난 안면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증명하듯 자리했다. 그러나 둘 중 이 방의 본래 주인에게 관심 두는 자는 없다.


“금방 나아.”


“네, 괜찮을 거예요.”


다만 흐음, 소리 내며 발을 휘젓던 요한이 블레이드의 상처가 낫는 과정을 자세히도 들여다보았다. 그야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라면 영광의 흔적이지 않던가. 모든 상처가 낫는, 영생의 영광. 요한이 추구하는 어떤 것. 그러나 요한은 오늘만큼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내가 했던 말이 그것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 그리 보지도 말고. ‘이런’ 건 너도 몇 번이고 봤을 텐데.”


“그렇지만요. 왜 굳이 자신을 해치고, 상처 입히시는 거예요? 아니. 그건 전투를 위해서니까…….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과도한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았나요.”


요한이 말갛게 물었다. 선을 넘을 듯, 넘지 않을 듯. 오늘은 전자에 가까운 듯했다. 그 탓에 미묘하게 낮은 목소리의 블레이드는,
“내가 너를 해친 것도 아니잖나.”


“형님.”
그가 힘주어 다시 불렀다. 그와 동시에 블레이드가 요한을 눈에 담았다. 눈앞에 그려지는 그의 얼굴에 진짜가 덧대어진다. 형님, 블레이드는 그 호칭이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선주의 장명종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던 때엔 그를 그리 부를 자가 없다시피 했으므로. 그리고 또, 그 이후엔……. 친밀한 관계라 덧대어 볼 수 있을 무언가가 존재치 않았다. 하여 단지 그 모든 것이 어색했다.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냥요.”


눈을 접어 배시시 웃는 요한이었다. 무언가를 무마하고자 할 때 짓는, 경계심을 낮추려는 의도의 ‘그런’ 미소. 블레이드가 혀를 차며 제 상처를 손끝으로 쓸었다. 면역 작용인지, 풍요의 힘인지 상처 부위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그에 비해 그의 손끝은 지나치게 차가웠고.
이대로 피부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파내더라도 아프지는 않을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리되었다. 고통이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는 미치는 것이 차라리 쉬웠다. 끓어 넘치는 광기에 몸을 맡기면, 그 이후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듯해진다. 이지를 잃는 것은 싫으나 그 현상 자체를 마냥 싫기만 했다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다.
상처받은 자는 상처 입히는 자가 된다. 하여 마침내 그 자신까지…….


아프지 않았다. 바로 직전의 임무에서 칼을 허벅지에 꽂아 넣을 때 역시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살에서 칼을 뽑아냄과 함께 피에 물드는 허벅지와, 바닥을 신발 모양으로 적시는 핏자국을 보았을 때는 더더욱. 그때엔, 요한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블레이드 자신은 그 사실이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괜히 힘없는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온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요한이 반쯤 농담처럼 너스레를 떨며,


“하지만 형님, 예고 정도는 해주세요. 놀란다고요.”


하하……. 문득 푸른 눈이 빠르게 깜박여졌다.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자신은 종말을 본다. 미래를 본다는 것이 보다 명확한 표현이나, 결국 보게 되는 미래가 종말이라면, ‘종말을 본다’는 문장에 틀린 점은 없을 것이다. 요한은 언제나 종말을 보았다. 잠시 거하는 곳에서조차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지 않게 된 지 무척 오래된 생각. 언젠가 그를 비난하던 누군가가 속삭였던.


――어쩌면 말이다, 그가 종말을 ‘보는’ 것이 아닌 ‘불러오는’ 것이라면.


요한이 제 귀 뒤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문질렀다. 그리고 아하하, 그다운 미소와 함께,


“언젠가 형님이 죽는 꿈을 꾸게 되면 어떡하죠.”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공조사의 「백야」라는 자리엔 손재주만이 아닌 압도적인 두뇌 역시 필수불가결하지 않나. 블레이드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안다. 그러므로 답했다.


“네가 거슬려.”


“우와, 진짜 맥락 없는 답이네요.”


“굳이 부연하자면,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거슬린다.”


“에.”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러고서 블레이드는 눈을 감았다. 그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라는 듯.
요한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책상에 걸터앉았던 몸을 바닥에 내렸다. 탁, 발이 땅에 닿는다. 요한은 그것이 괜스레 생경했다.


다가갔다. 물론 대상은 ‘형님’이다. 몸을 숙이는 도중 깨진 거울과, 그것에 비친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기대어 주저앉은 블레이드의 상처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은 남자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요한은 가져다 댄 손을 움직여 단지 쓰다듬었다. 어떤 힘도 없이.
뜨겁네요. 중얼거린 그가 다시 고개 올려 상처의 주인을 보았다.


어느새 눈 뜬 그와 시선이 얽힌다. 요한은 다시 한 번, 상처를 문질렀다. 역시 아주 미약한 힘으로. 곧 ‘형님’의 눈이 짧게 위와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서는 한숨과 함께,


“아프니 그만하지 그래.”


그러자 요한이 웃었다. 의뭉스러우면서도 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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