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속으로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면
@YuSeong_1999
“죽었네요.”
“죽었지.”
건조한 바람이 스친다. 흐릿한 햇빛이 닿는다. 들려오는 것은 두 사람의 목소리이나 이곳에 있는 것은 둘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다. 사람이 죽어 영혼을 남긴다면, 그래서 그 영혼이 자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검에 담긴다면, 이 무덤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말해야 할까.
그러한 흑백의 풍경. 요한의 순백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되살아나는 일도 없겠죠.”
“선주인들이 들었다면 네 목을 따려 했을 거다.”
“그냥 그렇다고요. 게다가 그런 기적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블레이드 씨처럼 아주 대단하신 분에게나……. 알았어요. 그런 눈 마요. 무섭다고 몇 번을 말해요.”
요한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빙그레 올라간 미소가 꺼지는 일 없이. 그러나 블레이드는 어느새 한 걸음 앞서 걸어간다. 그리고 그곳에 박힌, 아마 그 자신이 박아 넣었을 검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물었다.
“무엇이?”
예? 되묻는 요한을 향해 블레이드는,
“무엇이 두렵지?”
이번의 요한은 되묻지 않았다. 답조차 않고 그저 가만히 이 검의 무덤을 눈에 담았을 뿐이다. 아주 짧게는 제 입술을 깨물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블레이드가 그것을 아는 일 또한 없다. 그 또한 함께 검의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이 이 무덤을 장식한다. 흙을 파고 들어가 누운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무기질의 무덤을.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두 사람이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것도, 길을 잃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두 사람에게 목적지란 없었으므로 ‘헤맸다’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지 않겠나. 길을 잃지 않아도 길을 헤맬 수,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바위에 등을 맞대고 앉은 두 사람이다. 옆에서 바라본다면 완벽한 직선을 닮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나 평평한 바위 위를, 석상처럼 앉아.
등을 맞대고도 서로의 등에 각자의 무게가 기대어지지는 않는다. 맞닿은 체온에도 몸이 덥혀진다는 감각은 자리하지 않았고. 요한은 고개 숙여 발아래의 자갈을 센다. 하나, 둘, 셋……. 그러나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요한의 고개가 들어 올려진다. 이제 그의 눈에 담기는 것은 흑백의 하늘이다. 눈을 굴려 왼쪽을, 오른쪽을, 위를 보아도 블레이드가 그의 눈에 담기지는 않는다. 그제야 그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워냈다.
“형님께서는 죽인 자들을 동정해 본 적 있으신가요?”
하나, 둘, 셋……. 죽은 자들을 세는 것은 이제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그러하다. 구하지 못했던 자들을 세는 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자들을 세는 것도 이제는 그 숫자에 의미가 없다. 거대한 호수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해서 그것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의미를 둘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없을 테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미안함이나 죄책감은요?”
말이 많다.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블레이드의 눈이 뜨겁게 식는다. 그것이 요한을 향한다. 바라본 요한의 눈에 블레이드 자신이 담긴다. 그는 그것을 아주 오래 바라본다.
돌연 요한의 등에 어떤 감촉이 닿는다. 블레이드가 움직인 모양이다. 그것은 아주 짧았다. 맞닿은 등이 떨어지지, 않았다.
“없어. 그러기에는 너무나 지쳤다.”
타인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블레이드의 몸은 몇 번이나 망가지고도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나 마음만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의 몸이 불멸의 의지를 선물하지는 못했으므로. 아니다. 어쩌면 그는 가족을 잃었을 때부터 이미…….
“저도 마찬가지예요.”
요한이 맑게 웃었다. 무덤의 영혼이나 볼 수 있을 미소를, 너무나 명랑하게.
――그날은 반드시 온다.
혹자는 말한다. 아침은 반드시 온다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그래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그 말에는 틀린 점이 없다. 그러나 그것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고, 요한은 생각한다. 내일의 태양과 함께 예정된 종말 또한 함께 떠오를 것이라고. 그래서 그 어두운 아침에 우리는 죽을 것이라고. 세계를 무덤 삼아 묻힐 것이라고.
구하고 싶었다. 요한은 그러했다. 그는 사람이었으므로 마땅히.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예정된 멸망을 믿지 않는다. 어떤 앎은 고통이 되므로, 그의 예지는 검도 방패도 되어주지 못했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막을 수 없다. 결국 미래는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그 물리 법칙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이 요한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
빛은 직진한다.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직선은 정확하고도 날래며 가혹하다. 그러므로 빛은 우주에 존재하는 무엇보다도 빠르다. 그리하여 시간은 거슬러질 수 없다.
드넓은 우주에, 수많은 기적을 뒤로하고도, 실은 그 우주가 곡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가 이해했겠나. 그리고 받아들였겠나. 둥근 행성은 그 면이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한다. 동그란 별은 각지지 않아 언젠가 폭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을 동정치 않기로 했다. 죄책감 느끼지 않기로 했다. 그야 보다 쉬운 선택지가 바로 옆에 놓여 있지 않던가. 그들을 원망한다는…….
하지만, 과연 그러했던가?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던가?
그는 그렇게나 강인했나?
“참 이상하죠.”
“무엇이.”
낮게 울리는 거친 목소리는 틀림없이 요한에게 익숙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잠시간 스쳐 갔던 그 감정을 그는 외면한다. 침을 한 번 삼킨 요한은,
“그런데도 우리는 무덤으로 돌아오게 되고 마네요.”
“당연한 것 아니냐.”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 언젠가는.”
그러니 무덤으로의 귀결은 당연한 것이라고. 돌연 요한의 등에 느껴지던 감각이 엷어진다. 블레이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 탓이다. 무릎에 기대어 턱이라도 괸 것일까. 요한이 제 목덜미를 긁는다. 그의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어디로?”
“그러니까.”
그러고도 요한은 한참을 답하지 못했다. 다시 등에 어떤 감각이 인다. 이제는 그 엷었던 감촉마저 사라진다. 블레이드가 일어선 것이다. 요한은 그러고도 뒤돌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러기를 잠시. 불현듯 블레이드의 손이 요한의 어깨에 놓인다. 정확하게는, 블레이드가 제 손을 요한의 어깨에 놓은 것이다. 요한의 등 뒤에서 그의 어깨를 향해. 이것은 능동적인 행위이며 그의 오롯한 선택이었으므로.
요한의 녹색 눈에 빛이 들어찬다. 그것은 영혼이 들어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무덤의 수많은 영혼이거나, 또는 어쩌면 그 자신의 영혼이거나. 정답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 순간 그 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집으로요.”
“집이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있었나? 너는 비밀이 참 많은 듯해.”
요한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다시 자갈이 눈에 담긴다. 어디서까지 세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린 그 자갈들은. 속으로 다시 되뇌인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열셋까지 세고 나서야 요한은 일어서서 블레이드를 마주한다.
늘상의 그 미소가 유난히 투명한 것 같다고, 블레이드는 생각했다.
“대충 그런 셈이죠.”
영생에의 바람. 종말과 실패 속, 여전히 그들을 구하기를 원하는 것. 몇 사람이나마는 실제로 구했던 것. 그런 것들도 집이라 이름 붙이기에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붙잡고 살아갈, 돌아올 무언가가. 또한…….
“그래서 말이에요.”
“또 뭐냐.”
“저는,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해요.¹”
나는 예지 아닌 이정표를 바랍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흑백의 하늘이 어두운 아침을 닮은 것도 같았다.
¹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연애편지에 언급된 말. 원본은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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